[그때와 지금]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천재 무용가 최승희, 북에서 버림받고 사망
2003년 11월 북한의 조선중앙TV는 무용가 최승희가 1969년 8월 8일 사망했다고 전했다. 생사조차 아리송하던 그녀의 최후를 우린 34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 셈이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1938년 12월 17일 파리 무대에 선 최승희는 “동양 최고의 무용가”라는 격찬을 받는다. 그녀의 초립동춤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 공연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여인들 사이에 초립동 모자가 유행했다.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 공연을 마친 뒤 다시 파리의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을 때 객석에는 파블로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도 앉아 있었다. 이후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때는 존 스타인벡과 배우 찰리 채플린이 구경하러 왔고 배우 로버트 테일러는 그녀의 춤에 반해 영화 출연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 어렵던 시대에 그녀는 어떻게 글로벌 춤꾼이 되었을까.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서울에서 양반집의 넷째로 태어났다. 숙명여학교에서 전교 2등을 할 만큼 수재였던 그녀는 26년 봄 일본 신무용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경성(서울) 공연을 본 뒤 운명이 바뀌었다. 최승희는 그를 따라 일본에 갔고 천부적인 창의성과 열정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일제 막바지 최승희는 위문공연단으로 동원돼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사회주의자인 남편 안막은 평양으로 갔다. 최승희는 이듬해인 46년에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다. 예술가였던 그녀는 남편보다 자유가 더 필요했을까. 그러나 오자마자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 명단에 오른다. 그녀는 그해 7월 도망치듯 38선을 넘었고, 북에서 김일성을 만나게 된다.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 김일성의 질문에 최승희는 살러 왔다고 말했고, 김일성은 대동강변의 요정 동일관 자리에 무용연구소를 차려준다. 남편은 이후 문화부와 문화선전부 부부장에 오르지만 59년 숙청 때에 사라진다. 최승희 소식이 나온 것은 86년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그녀가 중국으로 가다가 잡혀 처형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사망 일자가 나온 건 그로부터 17년 뒤였다. 전 세계가 열광했던 천재 무용가 최승희. 식민지와 이념의 질곡에 갇혀 헤매다 스러진 그녀는 아직도 조국에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당대를 주름잡던 스타들의 넋을 빼놓은 최초의 ‘한류’가 그녀다. 이제 최승희를 제대로 평가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