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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조선말기 정치 변동 따라 달력도 양력·음력 뒤바꿔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을 따라 배우려 했던 이들은 개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구 열강과 같은 시간체계를 세우는 시간의 문명화를 꿈꿀 수 없었다. "정삭(책력)을 바꿔 태양력을 쓰되 1895년 11월17일을 1896년 1월1일로 삼으라."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중국의 종주권이 부정된 1895년 9월9일 양력을 쓸 것을 명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1896년부터 연호를 세우되 일세일원으로 제정하라." 양력 시행과 함께 채택된 건양 연호는 근대를 향한 꿈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개력을 주도한 친일 개화파가 몰락하자 정부는 국가 기념일과 제사의 택일을 다시 음력을 따르도록 되돌렸다. 결국 이 땅의 사람들은 음력과 양력이 경합하는 독특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했다. 설빔 차림의 사진 속 어린이들 뒤에 보이는 '입춘대길'과 '건양다경(건양의 치세에 경사가 많이 있으라)'의 입춘방은 전통과 근대의 시간이 충돌하던 그때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시간의 경쟁에서 졌다. 해방 직후 "학교종이 땡땡땡"을 부르며 자란 이들은 허비한 근대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바쁘다 바빠'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질주했다. 속도와의 전쟁을 멈추고 느림의 미학을 되찾고 싶은 오늘.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자연에 순응하는 목가적 시간을 노래한 옛 시조가 마음에 다가온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08

[그때와 지금] 식민지 조선 찾은 헬렌 켈러, 온몸으로 '장애극복' 외치다

20세기를 살다간 장애인 가운데 인간승리의 주인공을 든다면 아무래도 헬렌 켈러(1880~1968)가 첫손가락에 꼽히지 않을까?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삼중고의 장애인인 헬렌이 1937년 식민지 조선을 방문했다. 57세의 헬렌은 7월 13일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에서 강연을 했다. 류달영(후에 서울대 농대 교수)은 당시 개성 호수돈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헬렌의 강연을 들으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다행히 헬렌이 타고 가는 평양행 급행열차가 7월 15일 오후 4시40분에 개성역에서 1분간 정차할 때 객차 뒤쪽 전망대에 나와 강연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담임반 학생 50명을 이끌고 개성역에서 기다렸다. 열차가 기적을 울리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데 벌써 열차의 맨 뒤쪽에는 헬렌이 비서 폴리 톰슨과 일본의 유명한 맹인 철학교수 이와바시와 함께 난간을 짚고 서 있었다. 열차가 서자마자 헬렌은 강연을 시작했다. 사진 왼쪽부터 이와바시 헬렌 켈러 폴리 톰슨이다(사진=류달영 '소중한 만남' 솔). 폴리는 손가락을 벌려 헬렌의 입술과 목에 대고 입술의 움직임과 목의 진동을 파악해 명확하지 않은 그녀의 말을 정확한 영어로 옮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헬렌의 손바닥에 대고 마치 손가락으로 무선전신을 치듯이 두들겨서 주위의 상황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그 다음에는 이와바시 교수가 역에 모인 사람들에게 일본어로 통역해 주었다. 구경 나온 사람들에게는 진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역장과 차장도 구경하느라 넋이 나가 열차가 예정을 넘겨 5분 동안이나 정차하게 되었다. 이날 헬렌은 '이 세상을 향상시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며 사랑이 없는 국가와 사회는 퇴보할 뿐'이라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헬렌 켈러의 후반 생애는 열정적이었다. 한창때는 장애인을 돕는 일에 하루 18시간씩 바칠 정도였다. 그녀는 사형 제도를 반대하고 인종주의를 거부했으며 교통수단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열악하던 그 시절 지구를 아홉 바퀴나 돌며 39개국을 방문했다. 유럽.아시아.호주.아프리카까지 그야말로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했고 1937년에는 식민지 한국 땅에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삼중고의 헬렌이 전해준 메시지를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장애인과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사회가 그립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04

[그때와 지금] 맥아더, 일왕 전쟁 책임에 면죄부 주다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는 1945년 8월29일부터 51년 4월11일까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전후 일본의 밑그림을 그린 일본 점령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부임 직후 재벌의 해체와 육.해군성 폐지를 단행하고 평화헌법을 만들어 군국주의 체제를 해체해 나갔다. 51년 4월19일 그는 일본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음을 천명했지만 실상 일본의 전후 청산은 철저하지 못했다. 그는 점령 직후인 45년 9월27일 히로히토 일왕을 공사관으로 불러 접견(사진)했다. 군부와 재벌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의 중심축이었던 일왕은 비록 '살아 있는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기는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 살아남았다. 47년 중국 국민당이 공산주의자에게 그 기반을 잠식당하자 이듬해 11월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는 소위 '역코스'로 알려진 점령정책의 전환이 있었다. 재벌기업 자회사 폐지 계획은 흐지부지되었으며 극동 군사재판은 침략전쟁의 주역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때 미국은 점령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이 있을 경우 '일본 국민 자신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49년 중국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가고 50년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자 전범자는 죗값도 치르지 않고 정계에 복귀했다. 일본은 51년 미군 주둔을 허용하고 미국의 전략체제 속에 일본을 종속시키는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는 대가로 이듬해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립을 얻어냈다. 54년 방위청이 세워지고 자위대라는 미명 하에 다시 무장했으며 이듬해에는 평화헌법 개정을 당헌으로 내건 자민당이 집권했다. 풀뿌리 일본 시민사회의 선택으로 54년 만에 정권을 바꾼 민주당 정부가 그간의 '역코스'에 어떠한 제동을 걸지 못내 궁금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03

[그때와 지금] '노인 동맹단' 강우규 의사, 조선 총독 향해 폭탄 투척

3.1운동은 이 땅의 민초들에게 나라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한 이정표였다. 그들은 그 누구의 신민이 아닌 공화제 민주정부를 세울 시민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은 젊은이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1919년 3월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동맹단' 결성을 주도한 노인들에게도 조국의 독립은 포기할 수 없는 확호불발한 이상이었다. 그때 그들은 일제 요인 암살을 통한 적극 투쟁이 독립 달성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책무를 자기 어깨에 걸머진 이가 바로 64세 노인 강우규(1855~1920.사진.일제하 서대문형무소 수형 카드)였다. 그해 9월2일 오후 5시쯤 그의 손을 떠난 폭탄 한 발이 신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탄 쌍두마차 앞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 마중 나온 일제 요인들로 북적대던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귀빈실 주변은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됐다. 표적이었던 사이토는 요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3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눈발이 휘날리던 1920년 2월15일 키가 크고 둥근 얼굴에 은실 같은 호랑이 수염을 기른 그는 회색 두루마기 차림으로 발을 퉁퉁 구르며 법정에 들어섰다. 그는 거사 이유를 묻는 판사의 질문에 당당히 소신을 밝혔다. "일본은 불의로써 우리나라를 병탄했다. 이는 세계의 인도가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조선의 국민으로 너희들의 노예로 복종할 수 있겠는가. 일본은 조선을 지배할 능력이 없으며 이른바 동화란 유치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해 11월29일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앗긴 그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01

[그때와 지금] 영국 자유당의 사회개혁 중산층 외면으로 '흔들'

1900년대 초 당시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은 몇몇 뜻있는 개혁을 이룩했다. 그러나 1905년경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 자선단체의 구호품을 기다리는 부두 노동자 자녀들(사진)의 옷차림과 표정에서 알 수 있듯 개혁은 엄청난 소득불평등 하층민의 빈곤 노인.무직자.병약자의 고통 불결한 주거 등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했다. 그 결과 1906년 1월 선거에서 영국 자유당은 유례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보수당이 157석 자유당은 377석을 얻었다. 이 선거로 17년간의 보수당 지배가 끝났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1837~1901)에는 빈곤을 당사자들의 개인적 결함으로 돌리는 풍조가 일반적이었고 보수당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 집권한 자유당은 사회적 평등에 좀 더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실업.보건.주택.교육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공정한 분배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새로운 흐름을 '신자유주의'로 불렀다. 70년대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와 이름은 같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그 결과 1908년 노령연금법안 등이 실행돼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개혁은 급격한 재정확대를 가져왔고 늘어난 재정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1909년 혁명적이라 할 만한 대규모 예산을 의회에 상정했다. '인민예산'이라 불린 이 예산안은 귀족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부담은 대부분 부유층에 돌아가게 되었다. 보수당 일각에서는 "이것은 예산이 아니라 혁명이다"라고 말했다. 가까스로 하원을 통과한 예산안은 상원에서 걸렸다. 상원 귀족들이 이 예산안을 '부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350대75로 부결시켰다. 자유당은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에게 심판을 맡겼다. 1910년 1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자유당은 승리는 했지만 보수당보다 2석 많은 27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에게는 환영받았지만 중간계급을 자유당에서 떨어져 나가게 했던 것이다. 1906년 선거는 '비국교도=자유당' '국교도=보수당'으로 종교가 좌우했지만 1910년 선거는 계급이 주된 동력이었다. 과거 비국교도라는 이유로 자유당을 지지했던 중간계급이 이번엔 보수당을 선택한 것이다. 중간계급의 노동자 외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그러나 지역감정이 '종교'처럼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에게는 '계급'이 주된 동력이었던 100년 전 영국 정치가 타산지석으로 다가온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31

[그때와 지금] 한센병 시인 한하운 '빨갱이' 소동 휘말려

"한센병 한하운 시인이 수상하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8월 '문화 빨치산' 논란이 들끓는다. 그의 시 '행렬'에 나오는 '핏빛 기빨'이 공산당의 상징인 적기(赤旗)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한 주간지는 '한하운(韓何雲)'이란 이름도 한국을 구름으로 조롱하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10월 한하운은 자신의 혐의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신문사를 찾아갔다. 기자들 앞에서 '보리피리'라는 즉흥시를 짓기도 했다. 그에 대한 보도가 나간 뒤에도 한 논객은 "가을에 '보리피리'를 쓴 것도 수상하다"면서 "한하운은 유물변증법적 창작 방법을 천부적으로 체득한 인물"이라고 단정했다." '간밤에 얼어서 손꼬락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우에 떨어진다'는 구절은 당국이 '문둥이'와 '빨갱이'를 판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농간"이라고 주장했다. 한 국회의원은 한하운의 시집 출판을 '공산주의 선전전'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안국장 이성주는 "조사 결과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시집도 좌익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20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한하운(본명 한태영)은 일본과 중국에서 고교.대학을 나온 유학 엘리트였다. 해방 후 가산이 몰수된 뒤 노점 책장사를 하다가 함흥 학생시위 때 얼떨결에 체포됐고 이후에도 몇 차례 감옥에 갇혔다. 원산의 감호소를 탈출해 월남한 그는 서울 명동의 술집과 다방 음식점 입구에 서서 시를 써주고 손을 내밀었다. 59년에는 한센병 음성으로 진단받아 사회에 복귀하고 한미제역회사를 설립한다. 천형을 앓으면서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도우며 살던 한하운은 75년 3월 인천서 나병 아닌 간경화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시 '벌(罰)'의 한 구절)라고 절규한 한하운은 전후의 히스테리 속에서 한때나마 어처구니없는 이념적 형벌까지 덤터기를 썼던 것이다.

2009-08-30

[그때와 지금] 조국보다 한국 더 사랑한 베델, '한민족 구하라' 유언 남기다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이방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올해는 그가 서른일곱의 길지 않은 삶을 마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러.일전쟁이 터져 왕조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1904년 3월 영국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의 통신원으로 이 땅을 밟았다. "조선의 실정을 직접 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표를 던진 그는 양기탁과 손잡고 자신의 신문을 찍어냈다. 1904년 7월 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는 나라가 망하는 1910년 그날까지 여섯 해 동안 일본 침략하 조선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는 신문의 지면은 일제의 탄압과 검열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의 무풍 지대였다. 박은식.신채호.안창호 같은 당대의 논객들은 그를 울타리 삼아 민족의 목탁으로 마음껏 울 수 있었다. 헤이그 밀사의 구국 활동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친일파 스티븐스 응징 등 저항 운동에 대한 보도는 의병들의 가슴에 구국 투쟁의 불씨도 댕겼다. 또한 이 신문은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이자 신민회와 같은 항일 비밀결사의 기관지 역할도 했다. 눈엣가시처럼 껄끄러운 그를 쫓아내기 위해 통감부는 영국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그는 1907년 10월과 이듬해 6월 두 차례나 재판정에 섰다. 두 번째 재판에서 3주 금고형을 선고받은 그는 상하이로 압송되었다. 형기를 마친 뒤 1909년 5월 1일 그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그는 열여섯부터 서른둘까지 16년을 일본에서 살았다. 그러나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해 한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이 웅변하듯 5년 남짓 지낸 한국을 마음속 깊이 담았다. 스물다섯 되던 해 일본 고베에서 찍은 그의 모습이 살갑게 다가선다(사진=베델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베델처럼 이 땅에 살며 가까이에서 한국인을 접한 몇몇 서양인은 일본의 선전이 왜곡된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진보의 일본과 퇴보의 한국'. 서구 주류 사회의 대다수 인사들은 문명과 야만 합리와 비합리 발전과 정체 같은 이항 대립의 일그러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한국이라는 자그마한 보트가 가라앉지 않으려면 반드시 일본이 견인해야 한다." 미국인 데네트 타일러의 독설은 그때 서양인들 열 중 아홉 이상이 품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저민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8-28

[그때와 지금] 괴테가 뽐낸 독일어의 우수성, 한글도 '풍부한 콘텐트'가 관건

1749년 8월 28일 태어난 독일 문호 괴테는 1825년 자택을 방문한 한 영국인에게 독일어의 우수성을 열정적으로 자랑했다. "귀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문학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때문만 아니라 이제 독일어를 잘 이해하기만 하면 다른 말을 많이 알지 못해도 되기 때문이지요. 다만 프랑스어만은 배워야겠지요. 프랑스어는 사교 언어이고 특히 여행 중에는 없어서는 안 되니까요. 누구나 알고 있어서 어디로 가든 통역 대신에 그 말로써 일을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언어는 매우 유연합니다. 그 때문에 독일어 번역은 매우 충실하면서도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좋은 번역이 있으면 시야가 매우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프랑스어 번역으로 키케로를 읽었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원어로 읽는 것 못지않게 훌륭하게 읽었던 거지요." 우리도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한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 자랑과 괴테의 독일어 자랑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한글의 '과학성'을 자랑하는데 괴테는 독일어의 '콘텐트'를 자랑한다. 과학성과 콘텐트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최신형 컴퓨터가 우수하듯이 최신형 문자가 과학적으로 우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걸 자랑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문자는 무엇보다 지식을 전달하는 그릇이다. 아무리 우수한 '그릇'이라도 그 안에 담긴 '음식물'이 함량 미달이라면 허망하다. 허기진 배로 그릇만 상찬해서 무엇 하겠는가. 우리가 한글보다 과학성에서 뒤떨어진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콘텐트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번역이 얼마든지 있어서 한글만 알아도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얼마든지 섭렵할 수 있다고 자랑할 날이 우리에게는 언제 올까. 괴테는 이미 200년 전에 독일어가 그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랑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26

[그때와 지금] 북한의 판문점 ‘도끼 살해’ 만행

사진 오른쪽의 저 미루나무 한 그루가 발단이었다. 여름인지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나무의 잎이 무성해서 시야를 가렸다. 1976년 8월18일 제5 관측소를 맡고 있던 미군들이 가지치기를 하러 갔다. “됐어. 그만 잘라!” “더 잘라!” 나무 아래에서 북한군과 미군의 언성이 경쟁적으로 높아졌다. 가지를 치던 한국인 근로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때 북한군 박철 중위는 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은 뒤 “죽여”라고 소리를 질렀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북측은 벌목용 도끼를 주워 보나파스 대위와 배리트 중위를 학살했다. 이 만행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은 충격적이었다. 살벌한 상황에서 미군이 카메라를 준비해 동영상을 찍었다는 것도 놀랍다. 사진의 반향은 컸다. 한·미 양국이 발칵 뒤집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서종철 국방장관이 대독)에서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라고 말했다. 포드 정부와 주한미군은 한때 미루나무 주변을 초토화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숨을 고르고 우선 문제가 된 나무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작전명은 ‘폴 버년(Paul Bunyan)’이었다. 폴 버년은 도끼 하나로 나무 81그루를 단숨에 자르고 로키산맥을 평지로 만든 미국의 전설적 영웅이다. 도끼를 응징하러 ‘도끼 수퍼맨’이 나선 셈이다. 미군이 8월21일 오전 7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을 때 ‘데프콘2’(공격준비태세)까지 발동됐다. 핵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가 미국에서 떴고 괌에선 B-52 폭격기 3대가 날아올랐다. 항모 미드웨이호가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과 함께 동해의 북한 해역으로 이동했다. 태권도 유단자인 한국 특전사 요원 64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에 배치됐다. 북한은 노농적위대와 붉은청년근위대에 전투태세를 명령하고 ‘북풍1호(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미군들이 나무를 쓰러뜨렸다. 그때 비무장으로 작전을 수행하던 한국 특전 요원들이 갑자기 몸에 숨긴 무기를 꺼내 조립했다. 그들은 북한 초소 4개를 파괴하며 도발을 유도했다(상부의 은밀한 ‘응징’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군은 꼼짝하지 않았다. 만약 북한이 저항해서 전쟁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은 최악의 경우 전술핵을 쓸 생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루나무가 한반도 핵전쟁을 일으킬 뻔한 사건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은 33년 전 그날이다. 남북간 대치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상국(문화칼럼니스트)

2009-08-23

[그때와 지금] 로마제국 원동력은 '관용' 정신···한국은 다인종사회 준비돼 있나

세계제국 로마는 처음에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13세기 트로이 왕족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멸망 후 일족을 이끌고 탈출 천신만고 끝에 로마 근처의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아이네아스의 후손 중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등장해 기원전 753년 4월 21일 테베레 강가에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에는 '쌍둥이 형제에게 젖을 먹이는 늑대 상'이 전시돼 있다(사진). 그러나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레무스는 로물루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뒤 로물루스는 자기 이름을 따 나라 이름을 로마라고 정했다. 라틴족으로 출발한 로마 왕국이 맨 처음 갈등을 빚은 것은 인근의 사비니족이었다. 로마는 네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사비니족을 강제로 합병하지 않았다. 사비니족의 왕과 로물루스가 공동으로 왕이 된 것이다. 결국 로마는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됐다.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됐다. 패자인 사비니족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대등한 합병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패자조차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로마와 인접한 에트루리아의 주민 중에는 이민족을 차별하는 에트루리아 사회의 폐쇄성에 실망하고 새로운 거주지로 로마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로마는 이를테면 '기회의 땅'이었다. 로마의 '관용' 은 공화정.제정으로 이행된 뒤에도 계속 유지됐다. 1790년 미국 헌법의 기초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인은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 관용이야말로 로마가 뻗어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2020년이 되면 외국인과 이주민이 더욱 증가하면서 우리 사회가 인종적.민족적.문화적으로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 사회가 포용하지 못할 경우 이들은 하층계층을 형성하고 사회불안을 가중시키게 된다. 이들로 하여금 한국 사회의 기회구조에 공평하게 참여하고 한국인으로서 소속감을 갖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 발전의 중요한 조건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관용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족'끼리도 이념과 지역으로 편을 갈라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쉽사리 '이민족'에 대한 관용을 배울 수 있을지 우려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21

[그때와 지금] 침략전쟁 참여 독려한 이광수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 변명

"지금 세계는 우승열패 약육강식 잘난 놈은 이기고 못난 놈은 져서 약한 놈의 살을 강한 놈이 먹는 생존경쟁의 시대다. 교육과 산업으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1905년 1월 일본 유학 길에 오른 이광수(1892~1950.사진)는 일인들이 판치는 이 땅을 보며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다졌다.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은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 유학 시절 다양한 지적 사조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삶을 일관되게 꿰뚫은 것은 민족이나 미래에 올 국가였다. 1921년 그는 흥사단운동을 전개하라는 안창호의 지령에 따라 이 땅에 돌아왔다. 1922년에 펴낸 '민족개조론'도 그의 붓으로 쓰인 안창호의 저작이었다. 안창호가 서거한 1938년 이후 그는 '민족을 위한 친일'을 설파하는 논객을 자임했다. "징용에서는 생산기술을 배우고 징병에서는 군사 훈련을 배울 것이다. 산업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은 동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민족의 실력은 커질 것"이라 하여 조선인이 제국의 성장에 공헌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라 확신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그대들이 피를 흘린 뒤에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을 아니 주거든 내가 내 피를 흘려 싸우마"라며 조선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동참하라고 호소했다. 사진은 그 시절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해방 후 반민특위의 신문을 받으며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은 확신범이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에게 잡혀 다녔고 대한민국에서는 반민법으로 잡혔고 공산당은 반동이라고 잡아갔다." 딸 이정화의 하소연이 잘 말해 주듯이 그는 민족을 앞세우는 쪽의 눈에는 '반민족적 친일파'로 민중을 중시하는 쪽의 눈에는 '반민중적 부르주아'로 비칠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 공산주의자의 74%가 전향할 만큼 어느 누구도 파시즘이 지배하던 시대의 광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민족이나 민중의 이름으로 그를 단죄하기보다 '민족을 위한 친일'의 논리구조를 낱낱이 파헤치고 아직도 우리 안에서 숨 쉬는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사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8-20

[그때와 지금] 루돌프 발렌티노 31세로 요절···상심한 여성팬들 물밀듯 조문

1926년 8월23일 영화사상 최초의 섹스 심벌로 평가되는 루돌프 발렌티노(1895~1926.사진)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1920년대의 가장 유명한 배우이자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였던 그가 죽자 여성 팬들 사이에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 발생했다. 뉴욕 시내에는 약 10만의 인파가 발렌티노에게 애도를 표하기 위해 줄을 섰다. 장례식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치러졌다. 상심한 여성 팬들의 자살 보도가 잇따랐다.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팬들 때문에 유리창들이 박살났다. 8월24일은 온종일 폭동 상태였다. 기마경찰 100여 명과 뉴욕 경찰이 질서를 위해 배치됐고 밀집대형의 경찰들이 조문객들을 진정시켰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발렌티노는 18세 되던 1913년 미국으로 건너가 정원사.접시닦이 등의 일을 하다가 무용수가 되었다. 1918년에는 할리우드로 가서 영화의 단역을 맡다가 '묵시록의 4기사'(1921년)에 출연했고 열광적인 인기를 얻어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 후 1926년까지 주로 낭만적인 영화에 출연했다. 발렌티노와 가깝게 지낸 헤비급 복싱 챔피언 잭 뎀프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사내답고 용감한 남자였다. 여자들은 꿀단지에 빠진 파리들과도 같아서 그는 어딜 가든 여자들을 떼어낼 수 없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운 좋은 사내인가." 1926년 8월15일 밤 발렌티노는 갑자기 위궤양으로 쓰러졌다. 수술까지 받는 중태였고 합병증까지 있었다. 23일 드디어 별은 떨어지고 말았다. 돌연한 그의 죽음은 영화계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브로드웨이의 장례식장에 누워 있는 그의 시신을 보려고 무려 11블록에 걸쳐 조문객이 모여들었다. 발렌티노가 천국에 도착해 1921년 사망한 이탈리아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의 영접을 받는 광경을 묘사한 합성사진도 등장했다. 해마다 발렌티노의 기일이면 신비스러운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붉은 장미를 들고 무덤을 찾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발렌티노가 죽기 하루 전인 22일 하버드대에서 40년간 총장으로 있으면서 이 대학을 세계적인 대학으로 끌어올린 찰스 윌리엄 엘리엇(1834~1926)이 타계했다. 그러나 발렌티노 애도 열기에 묻혀 엘리엇의 죽음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교양 있는 시민들은 엘리엇 총장에 대한 애도 분위기가 발렌티노만큼 일어나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여겼지만 대학 총장과 '울트라 수퍼 스타'가 가는 길이 같을 수는 없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19

[그때와 지금] 4·19 이후 '이승만 깎아내리기' 90년대 들어 공적 재평가 활기

김구는 48년 4월19일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해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정부 세우기를 꿈꾸며 38도선을 넘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민족지도자로 우뚝 섰다. 반면 이승만은 46년 6월3일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48년 2월 미군정이 5월10일 총선거를 통해 단정 수립을 공포하기 훨씬 전에 나온 이 정읍 발언으로 인해 그는 남북분단을 앞장서서 이끈 '역사의 죄인'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또 이승만은 60년 4.19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내려오기까지 12년간 장기 집권했기 때문에 민주화에 역행한 독재자라는 딱지도 붙이고 말았다. 서울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세워진 지 4년 만인 60년 8월19일 모습을 감추었다. 동상 기단부의 비문도 무사할 수 없었다. 석공의 손에 들린 망치가 정을 내리칠 때마다 그의 공적은 하나 둘 지워져 갔다(사진=대한민국정부 기록사진집). 그 자리에는 김구의 동상이 들어섰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45년 9월20일자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정읍 선언 4달 전인 46년 2월에 사실상 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졌음이 알려지면서 이승만은 당시 소련의 팽창정책과 북한 정권의 실체를 꿰뚫어 본 혜안을 가진 정치가라는 평을 얻게 되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건국의 아버지'라는 호평과 민족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시대착오적 독재자였다는 혹평이 마주치는 지금. "되도록이면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좋다." 역사적 인물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를 앞서서 고민한 올곧은 지식인 천관우의 고언이 가슴에 와 닿는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8-18

[그때와 지금] '독일군과 관계했으니 배신자' 프랑스의 성차별적 여성 삭발

종군사진작가 로버트 카파(1913~1954)는 1944년 8월 18일 프랑스 샤르트르에서 머리를 깎인 채 모욕당하던 여성들을 카메라에 담았다(사진). 1944년 6월 6일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프랑스 각 지방은 여러 달에 걸쳐 점차 독일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레지스탕스 대원들 해방 전투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독일에 부역한 여성들을 체포해 강제로 머리를 깎았다. 때로는 옷을 찢거나 구타하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드골 임시정부의 사법기구에 의해 합법적 재판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삭발식은 때로는 부역자 자신의 집에서 비공개적으로 때로는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리에 이루어졌다. 약 2만 명이 삭발당했다. 대개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진 여성이 그 대상이다. 하지만 그 밖에 독일에 경제.정치.군사적 협력을 했거나 밀고 행위를 한 여성도 그 대상이 되었다. 부역 여성 삭발식은 정당화하기 어려운 폭력이었다. 아울러 과연 사사로운 애정관계를 '부역'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지도 문젯거리다. 여성에게는 독일군과 관계를 맺는 것이 곧 '조국을 배반'하는 의미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여성에게는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여성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1945년 4월 29일이었다. 한국이 여성 투표권을 도입한 것이 유엔의 결의로 치른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였으니 프랑스 대혁명의 발생지이자 시몬 보부아르로 대표되는 페미니즘의 모국 프랑스의 여성 투표권 도입은 뜻밖에도(!) 매우 늦은 편이었다. 그러므로 삭발식은 당시 팽배했던 남성 우위 문화가 과거사 청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17

[그때와 지금]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천재 무용가 최승희, 북에서 버림받고 사망

2003년 11월 북한의 조선중앙TV는 무용가 최승희가 1969년 8월 8일 사망했다고 전했다. 생사조차 아리송하던 그녀의 최후를 우린 34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 셈이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1938년 12월 17일 파리 무대에 선 최승희는 “동양 최고의 무용가”라는 격찬을 받는다. 그녀의 초립동춤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 공연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여인들 사이에 초립동 모자가 유행했다.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 공연을 마친 뒤 다시 파리의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을 때 객석에는 파블로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도 앉아 있었다. 이후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때는 존 스타인벡과 배우 찰리 채플린이 구경하러 왔고 배우 로버트 테일러는 그녀의 춤에 반해 영화 출연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 어렵던 시대에 그녀는 어떻게 글로벌 춤꾼이 되었을까.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서울에서 양반집의 넷째로 태어났다. 숙명여학교에서 전교 2등을 할 만큼 수재였던 그녀는 26년 봄 일본 신무용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경성(서울) 공연을 본 뒤 운명이 바뀌었다. 최승희는 그를 따라 일본에 갔고 천부적인 창의성과 열정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일제 막바지 최승희는 위문공연단으로 동원돼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사회주의자인 남편 안막은 평양으로 갔다. 최승희는 이듬해인 46년에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다. 예술가였던 그녀는 남편보다 자유가 더 필요했을까. 그러나 오자마자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 명단에 오른다. 그녀는 그해 7월 도망치듯 38선을 넘었고, 북에서 김일성을 만나게 된다.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 김일성의 질문에 최승희는 살러 왔다고 말했고, 김일성은 대동강변의 요정 동일관 자리에 무용연구소를 차려준다. 남편은 이후 문화부와 문화선전부 부부장에 오르지만 59년 숙청 때에 사라진다. 최승희 소식이 나온 것은 86년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그녀가 중국으로 가다가 잡혀 처형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사망 일자가 나온 건 그로부터 17년 뒤였다. 전 세계가 열광했던 천재 무용가 최승희. 식민지와 이념의 질곡에 갇혀 헤매다 스러진 그녀는 아직도 조국에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당대를 주름잡던 스타들의 넋을 빼놓은 최초의 ‘한류’가 그녀다. 이제 최승희를 제대로 평가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

200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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